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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예술

붓과 팔레트를 든 자화상- 에드워드 슈타이켄(2)

by 다러블리 202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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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학과 화학의 작용에 순응하는 시간의 이상주의 미학의 눈에는 어떠한 정신도 작용도 어떠한 감정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기계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단 몇 초 혹은 그 이하의 순간에 이미지의 구성 작용이 과학적으로 완료되는 사진은 어떤 창조성 지성, 상상력의 비약을 물리적으로 차단한다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진도 고상한 정신과 감수성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19세기 말에 형성된 회화주의는 이상주의 미학과 규정되는 예술의 조건에 부응하기 원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진도 창조적 정신과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이 추구해야 할 것의 모델로 회화라는 매체를 상정한 사진이 예술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이상주의 미학이 정신과 상상력이 모험적인 재현으로 여기는 회화를 모델로 상정한 다음 회화주의는 사진도 회화와 동일한 것으로, 혹은 거의 유사한 창조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습니다. 회화와 생산 과정의 동일성 내지 유사성을 증거 한다면, 사진도 회화와 동등한 예술적 지위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회화주의가 태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화주의는 회화의 생산 원칙, 과정이라는 여겨지는 것을 사진적 재현에 적용시켜 기계적 재현, 상업적 재현으로 통하는 사진 행위를 고상한 창작 행위로 드높이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슈타이켄이 손에 든 팔레트와 붓은 회화주의가 이제 회화의 원칙 생산 원칙과 과정을 사진의 것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린다는 뜻입니다. 당시 회화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진가들과 슈타이켄의 심층 욕망을 고려한다면 슈타이켄이 티치아노의 <장갑을 낀 사내>라는 초상의 사진으로 응답하리라 생각하고 팔레트와 붓을 집어 든 것은 모순된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슈테이켄을 비롯한 회화주의 사진가들은 사진 행위가 지상과 감성의 부재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계적 행위가 아니라 회화처럼 정신과 감정을 동원하고 투사하는 창조적 행위임을 붓과 팔레트로써 의미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자화상의 의미 작용을 전기적 사실에 근거하여 티치아노와 같은 유명 화가가 되고자 하는 꿈으로 해석하는 것도 대체로 정당해 보입니다. 에드워드 슈타이켄은 그의 나이 40살까지 회화를 계속했고, 그림 전시회를 통해 화가로서의 사회적 승인도 확보하고 있은 터였기 때문입니다. 스물둘의 젊은 나이에 그는 분명 스스로도 화가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화상의 의미를 단순히 유명 화가가 되겠다는 그의 포부만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은 화가이기도 한 슈타이켄이 왜 그림으로도 그릴 수 있었던 붓과 팔레트를 든 자화상을 사진으로 찍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붓과 팔레트를 든 자화상의 의미 작용을 살피려면 이것이 사진적 재현이라는 자명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붓과 팔레트라는 회화의 도구를 든 화가의 슈타이켄을 사진가 슈타이켄이 <자화상>으로 찍었다는 사실은 사진 행위를 그리는 행위 동화시키려는 회화주의의 기도의 구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실 슈타이켄이 붓과 팔레트를 든 자화상을 위해 사용한 사진적 재연은 붓과 팔레트와 무관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자서전에서 얘기하고 있는 중크롬산 고무 인화법을 위시하여 그간 행한 이런 저런 실험은 모두 붓과 팔레트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가 붓과 팔레트를 든 자화상의 최종 프린트로 결정한 중크롬산 고무 인화법의 공정을 거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체화 물감을 용해시킨 아라비아고무의 중크롬산 칼륨을 섞어 용액의 감광성을 띠게 합니다. 이 용액을 붓으로 종이에 도포하고 건조시킵니다. 원판 네거티브를 이 인화지 위에 밀착하고 빛을 쏘이면 네거티브를 투과한 빛의 양에 따라 종이에 칠해진 중크롬산 고무의 용해도가 차이를 보입니다. 빛을 많이 받은 부분일수록 따뜻한 물로 수세하는 현상 과정에서 중 크롬산 고무가 용해되지 않는 반면 미노 광부의 중크롬산 고문은 쉽게 용해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전적으로 화학 과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사진가는 원하는 부분에 중크롬산 고무를 붓과 같은 도구로 더 씻어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진가는 원하는 색상과 효과를 얻을 때까지 수채화 물감의 색을 바꿔가며 이러한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색채의 메타포인 팔레트와, 팔레트와 맞닿은 붓은 반드시 화가로서의 슈타이켄을 표상하는 은유나 환유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붓과 팔레트는 중크롬산 고무 인화법이라는 사진적 재현을 선호하는 회화주의 사진가의 은유 혹은 환유일 수도 있습니다.

1858년 영국의 존 파운시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된 중크롬산 고무 인화 방식은 프랑스 회화주의 운동의 기수인 로베르 드마시에 의에 재도입되어, 에드워드 슈타이켄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화주의 사진가들을 가장 선호하는 인화 기법으로 자리 잡습니다.

중크롬산 고무 인화법이 회화주의 사진을 대표하는 인화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을 살펴보면, 단지 그 재연 효과가 인상파 회화와 흡사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회화주의 사진을 회화의 모방 더 나아가 회화의 모조품 정도로만 치부해 버리려는 의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단정한 회화주의가 사진의 역사에서 성취한 기여를 애써 무시하려는 독단의 산물입니다. 회화주의 사진가들이 고무 인화법을 선호한 것은 슈타이켄의 말을 인용하면 그 결과들이 사진가의 개성, 그의 기회, 그리고 그의 감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기획에 부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인화 방식과는 달리 고무 인화법을 현상 과정에서 화학적 반응이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의 개성 기획 감성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 인화 기법을 이상주의 미학이 예술 작품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정신과 감수성의 개입을 용인하는 기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음 편 계속)

 

 

 

 

 

 

 

(출처- 최봉림,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 디자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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