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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예술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라즐로 모홀리나기(1)

by 다러블리 202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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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즐로 모홀리나기의 기본 설명>

라즐로 모홀리나기에 대해 살펴보면, '망명'과 '도전'으로 점철된 라즐로 모홀리나기의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기는 1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창궐 등 격동의 유럽에서 보낸 시기입니다. 그는 바우하우스를 무대로 모더니즘과 유토피아 사상의 정점을 달리며 끝없는 예술적 실험과 실천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치의 바퀴를 피해 건너간 미국에서의 두 번째 시기에 그는 시카고의 바우하우스의 후신인 '스쿨 오브 디자인'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술의 사회적 실천과 디자인 교육이라는 신념을 학교와 산업 디자인의 영역에서 추구했습니다. 라즐로 모홀리나기는 회화, 조각, 타이포 그래픽, 무대미술, 북 디자인, 사진, 건축, 영화 등 디자인과 시각 예술의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면적인 활동을 펼쳤던 전방위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예술과 사인 및 유기적 결합을 추구하는 총체 예술을 지향했습니다. 특히 과학기술의 진보로 나타난 사진, 영화와 같은 매체들이 인간의 감각과 경험의 지평을 넓혀주는 예술의 새로운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 매체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선보였습니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한 예술적 성취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그때에는 그의 멀티미디어적 예술관과 작품 세계는 디지털 시대의 디자인 행로와 예술을 전망하는 데 매우 유효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작가 탐색>

-모홀로나기의 현재적 의미-

라즐로 모홀로나기는 1895년 유태인 혈통으로 헝가리 남부 지역인 바보소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농경 사업을 하던 부친이 미국으로 홀로 이민을 가버리면서 소식이 끊기게 되자, 그는 두 형과 함께 모홀이라는 작은 도시로 이주하여 변호사인 삼촌의 집에서 자라게 됩니다. 독신이었던 삼촌은 집에 대형 도서관을 갖추고 있을 정도로 교양이 풍부하고 문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모홀리나기라는 이름은 삼촌의 성 나기에 도시의 이름 모홀을 접두어처럼 붙여 지어진 것입니다.

1914년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반발이 일어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포병 장교로 참전했습니다. 그 후 러시아 국경 지역에서 심한 부상을 당해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입원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시와 드로잉에 몰두하게 됩니다.

제대 후 헝가리 문학지를 통해 시작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18년 23세가 되던 해에는 처음으로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기도 합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장교가 되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시와 문학, 미술의 재질을 보여왔던 모홀로나기였기에 결국 법학도의 꿈을 적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크고 굵직굵직한 역사적 소용들을 경험해 온 모홀로나기의 삶은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 역시 그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살펴봐야 정확한 의미를 짚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라즐로 모홀로나기의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파시즘의 파급 등 정치적 격동되는 유럽에서의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제 막 공항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열기 시작한 미 대륙에서의 삶입니다.

첫 번째 시기에 그는 모더니즘과 유토피아 사상의 정점을 달리며 끝없는 실천과 실험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에는  예술의 사회적 실천과 디자인 교육이라는 신념을 학교와 산업 디자인의 영역에서 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도적 기반을 다져나가는 데 몰두했습니다.

이렇게 유럽과 미국의 양 대륙을 동시에 섭렵하며 화동 했던 예술가는 모홀리나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살았던 유럽 출신의 예술가들은 파시즘의 창궐과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실로 대규모의 예술 인구 이동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현대 예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적으로 당시에 망명한 예술가들은 유럽 모더니즘의 성과를 미국에 뿌리내리는 일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모홀리나기는 어떠한 인물보다도 그 역할이 주도적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1937년에서부터 1946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한 9년여 동안 그는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자리 잡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밀도 높은 결실을 이루어냈습니다.

미국에서의 모홀리나기의 활동은 시카고의 인스티튜트 오브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모홀리나기의 예술 활동을 디자인 영역에 국한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펼쳐 보인 디자이너로서의 행동과 삶이 이미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실용화된 직업 개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디자인을 총체 예술의 한 단위로 보고 한 사회와 문화의 변동을 읽어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구도를 짜는 편집과 기획의 실천 행위로 자리매김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그를 디자이너라든가 사회의 사진가, 조각가, 화가 등과 같은 일정한 장르나 직업 개념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쉬지 않고 실험하고 창작하면서 예술과 삶의 결합을 실천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자세를 통해 넓은 의미의 예술의 개념과 실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활동상을 추적하다 보면 오늘날 새롭게 요구되는 예술 개념은 물론 예술을 통한 인간의 지각과 감각의 개발 사회의 변화의 촉매로서의 예술이라는 측면에 이르는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다음 편 계속)

 

 

 

 

 

 

 

(출처- 박신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라즐로 모홀리나기, 디자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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